곽수관 목사

 

다른 어느 때보다도 조용하고 차분하게 치러진 지방선거였습니다. 세월호의 물결이 너무 무거워 아무도 감히 거리에서 노래 부를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숨죽이며 개표를 지켜 보았지만 여도 야도 승리는 없었습니다. 그저 국민 앞에 역사 앞에 겸허하게 스스로를 돌아보며 다시 분발할 각오가 필요할 뿐이었습니다. 선거가 끝난 다음 날 거리마다 그대로 붙어있는 현수막들과 포스터들이 왠지 더 쓸쓸해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선거 때가 되면 저희 교회 앞마당은 각 후보자들을 돕는 운동원들로 북적댑니다. 우리보다 더 일찍 나와 좋은 자리를 차지해 사람들을 맞습니다. 네거리는 요란한 희망의 구호들로 시끄러워집니다. 공약대로라면 우리 지역은 금방 살기 좋은 전국 최고의 도시가 될 것 같습니다. 자기만 당선되면 반드시 그 일을 이루겠다고 약속합니다. 국민들은 속는 줄 알면서 그래도 또 한가닥 희망을 꿈꾸며 그들의 손을 들어 줍니다. 그리고 다시 실망하면서 세상살이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사람이나 정당보다도 후보자의 공약을 보고 표를 던지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도 선거장에 나가기 전에 한참의 시간을 투자하여 후보들의 공약을 꼼꼼히 따져 보았습니다. 하지만, 말뿐인 공약, 지키지도 못할 공약, 책임지지도 않는 공약이 우리의 선택 기준이 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른 후보들의 더 그럴 듯한 공약이 나오면 어느새 서로 카피해서 붙이다 보니 대부분의 후보들의 말이 대동소이합니다. 책임질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사람들의 표만 노리는 포퓰리즘(populism)이 되고 맙니다. 이에 화가 난 어떤 유권자는 공약대로 책임지지 않은 사람은 임기가 끝날 때 감옥에 보내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되면 무책임한 약속이 사라지고 책임질 수 있는 말만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라도 해야 우리 사회가 신뢰 사회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 교단도 9월 총회를 앞두고 교단을 섬기고 이끌어갈 임원들과 유지재단과 학교법인 이사들을 선출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습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총회 선거관리위원으로 섬기면서, 특히 올해는 서기가 되어 준비할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예년에 비해, 또 다른 교단들에 비해 많이 차분해지고 성숙해졌다고는 하지만, 세상의 본이 될 수 있는 교회의 선거 풍토를 바로 세워가는 일이 큰 숙제입니다. 저희 교단도 총회장과 목사·장로 부총회장 입후보자들에게는 <소견서>를 제출하도록 하고 그 공약을 교단 신문을 통해 알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거를 섬기면서 제가 느끼는 것은 사람들이 그 공약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임기 1년의 자리에서 대단한 것을 기대할 수도 없고, 공약도 새로울 것이 없다는 인식 때문입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도통한 것일까요?
 사실 공약보다 중요한 것은 시스템입니다. 지도자 한 사람의 약속에 의해 좌우되는 사회는 별로 건강한 사회가 아닙니다. 누가 그 자리에 있든지 공정하고 분명한 로드맵에 의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구조가 더 바람직합니다. 미국장로교(PCUSA)는 미국 최대의 장로교단이지만 그 총회장은 백인들만이 아니라, 흑인, 여성, 소수민족의 교회 지도자들을 돌아가며 세워 줍니다. 몇 년 전에는 한국 목사님이 총회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누가 그 자리에 세워지든 전체 구성원들의 신학과 핵심가치와 우선순위에 따라 모든 정책이 결정되기 때문에 흔들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공약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는 결국 집단 이기주의에 함몰될 수 밖에 없습니다. 최근에도 세종시 문제, 부산 지역 신공항, 과학 벨트 조성 등으로 국론이 분열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우리 인천도 경인고속도로 지하화, 인천 KTX나 GTX, 서울지하철 7호선 연장 등이 모든 후보들의 공약 속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공약은 국가적으로, 미래를 바라볼 때,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를 생각하기보다 당장 내게 표를 던질 사람들을 의식하기 때문에 지역이기주의에 빠지게 되고, 결국 이루어질 수도 없는 헛된 약속이 되거나 억지로 이룬 후에는 국민들의 혈세를 낭비하는 비효율성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이기심을 부추기는 공약이 아니라,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표를 의식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약속에 우리의 삶을 걸고 우리가 변화되기를 요구합니다. 그분의 약속은 영원합니다!